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이테 만 해전 (문단 편집) === 홀시의 북상 결정에 대한 논란 === 홀시의 결정에 대한 논란은 생각보다는 복잡하고, 또 팽팽한 편이다. 일단, 홀시의 결정으로 인해 7함대는 위기에 처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당사자인 클립튼 스프레이그 소장과 킨케이드는 공적인 보고서에서 조차 홀시의 행동에 대해 신랄한 평을 남긴다. 킨케이드는 전후에는 홀시와 사이가 크게 벌어진다. >In the absence of any information that this exit was no longer blocked, it was logical to assume that our northern flank could not be exposed without ample warning. >더 이상 출구가 막혀있지 않다는 정보가 없다면, 우리 함대의 북쪽 측면이 충분한 경고 없이 (적에게) 노출될리가 없다고 간주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해설 :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방어하는 부대가 없다는 것을 몰랐기에, 7함대의 북쪽으로 적이 올 줄 몰랐다. >클립튼 스프레이그 제독이 후일에 회고함. 38.1 임무전대의 매케인 제독 역시 홀시의 결정이 옳지 않다고 비판했고, 나중에는 홀시를 저격하며 발목을 잡는다. 34 임무부대의 윌리스 리 제독 역시 '전함에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는 불필요한 논평을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34 임무부대가 구리다 함대를 저지하는 것이 사마르 해전 당시의 전함의 의무였고, 그에 따른 피해는 마땅히 감수해야했으나, 그에 응하지 못했다는 불만을 에둘러 말한 것으로 여겨진다. >No battle damage was incurred nor inflicted on the enemy by vessels while operating as Task Force Thirty-Four. >34 임무부대로 활동하면서, 어떠한 전투 손실도 발생하지 않았고, 적의 수상함으로부터 타격을 받지도 않았다. >34 임무부대의 보고서 : 1944년 10월 26일 ~ 11월 3일.[[http://ibiblio.org/hyperwar/USN/rep/Leyte/TF-34-Leyte.html|#]] 여기까지는 홀시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당대의 제독들이 남긴 의견이다. 이제 이 논란을 해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의 관점으로 바라보자면, 가장 잘 알려진 다수설은 미 해군에 복무했던 하버드 대학 교수 새뮤얼 엘리엇 모리슨이 1947년부터 1962년까지 저술한 역작,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in World War II의 관점이다. 이 책에 따르면, 킨케이드, 니미츠는 홀시의 예상치 못한 전장 이탈에 당황한 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므로, 홀시는 '''북상하지 말고 제 자리를 지켜야 했으며''', 아침이 되면 구리다 함대와 교전을 해서 저지했어야 했다. 사마르 해전은 미군에게 행운이 따랐으나, 만에 하나 77.4함대와 77.2함대가 뚫리고 방어선이 무너졌을 경우 상륙병력은 적의 공격에 노출되었을 것이며, 이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올 것이었다. 그리고 모리슨은 오자와가 홀시를 낚았다고 해석했다.[* 후술하지만 아니다.] 오자와 지사부로가 홀시를 낚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본의 전쟁사 연구자들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었다. 모리슨의 저작은 권위가 있었고,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선으로 바라보므로, 한국에도 이 시선은 자연스럽게 수입된다. 하지만 해당 저술에서 나오지 않은 사실들과 해석들이 5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다양하게 추가되었고, 이제 아래와 같이 이에 도전하는 소수설들이 출현한다. 우선 홀시가 북상하는 것 그 자체에 대해서만 바라보자. 우선 홀시의 지위에 대해서 이해해야 한다. 3함대 제독은 태평양함대 사령관보다 격이 낮긴 하나, 3함대는 자신의 재량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제대 단위였다. 거기에 더하여, 홀시와 스프루언스, 킨케이드같은 최상급 지휘관들은 [[어니스트 킹]] 제독이나 [[체스터 니미츠]] 제독에게 태평양 전쟁의 전략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가령 스프루언스는 니미츠 제독과 함께 킹 제독의 고집을 꺾고, [[영국 태평양 함대]]가 일본 근해에서 작전하도록 방침을 바꾼다.] 홀시가 이 지위를 이용하여 북상을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북상을 하기 위해 전략적인 내용들을 고려할만한 자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게 마냥 주제넘은 행동도 아니었다. 그럼 실제로 전략적으로 고려한 내용들이 무엇인고 하니, 홀시는 항공모함이 치명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이 배들을 전부 배제하는 것이 태평양 함대의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일단 적 항공모함 세력을 일소하면, 미 일간의 균형추는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갈 것이고, 일본 해군의 전술적인 승리는 미 해군에게 의미있는 역습 내지는 치명적인 일격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이 생각은 실제로 태평양 함대 사령부에서 지배적이었으며, [[과달카날 해전]]을 시작으로 그 이후로 이어진 일련의 해전을 통해서 엄연한 사실로 증명되었다. 모리슨은 이미 이 주장에 대해 비판한 바 있는데, '''오자와 함대는 이미 껍데기였다'''는 주장이 모리슨의 비판이다. 이것은 사실이긴 하나, 태평양 함대는 알 도리가 없었다. 홀시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오답이긴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북상을 결정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모리슨의 주장은 결과론인데다가 전후에 알게된 지적인 우위를 이용한 비판이고, 1944년 10월의 홀시에게 그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부당할 수 있다.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 항공대가 사실상 재기 불가능할 타격을 입었고 미군도 전투 후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본 해군 항공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일본 항모가 껍데기인 것을 진작 알았을 수도 있지 않냐고 반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홀시, 리, 메케인, 미처 제독같은 제독들과 미군 참모들도 상술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홀시에게 이거 깡통으로 하는 낚시 아닐까요? 하고 건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항모 자체가 실존하고 있고(그것도 진주만을 때리러 온 철천지원수) 일본이 그 사이에 본토에서 훈련시킨 다른 해군 항공대를 채워왔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었다. 실제로 미국은 일본의 완전 항복 전까지 승기를 잡았다는 확신은 해도 방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홀시에게의 건의 중 확신에 찬 건의는 하나도 없고 모두 추측성 건의였다. 그렇다면 백번 양보해서 항공모함은 올라갈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면 신형 고속전함은 왜 끌고 갔냐고 반론할 수도 있으나 이 부분도 미해군의 항모 전술을 고려하면 참작이 가능하다. 미군은 대전이 절정에 달하던 시기 넉넉한 배수량과 떡장을 갖춰 몸빵이 가능하며 각종 대공 무기와 대공 관제 시설을 되는대로 장비할 수 있고 속도도 항모랑 함께 다니기에 충분한 고속전함들을 함대의 방패로 세워서 작전을 했다. 이들은 기동하는 항모전단 가장자리에서 레이더 관제를 하며 일본의 항공기나 수상함 세력으로부터 항모를 호위하였는데 방법만 다르지 이들은 오늘날의 이지스함과 비슷한 역할을 하였다. 즉 항모전단의 대공, 대함 방어의 당당한 한 축인 고속 전함들은 항모전단과 떼어낼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즈이카쿠가 미해군에 충분히 위협이 되며 깡통인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전을 위해 북상하는 항모 전단에서 고속전함을 빼고 간다는건 마치 미드웨이에서 항모를 선두 돌격시켰다가 4척 모두 말아먹은 일본 해군의 실수를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결국 신형 고속전함은 대부분 항모 전단 호위를 위해 가고 포격전이나 상륙 지원 업무는 굳이 빠른 기동이 필요하지 않은 구형 전함이 담당하게 되었다. 일본 해군의 돌입을 함포 사격을 통해 차단할 수리가오 해협의 올덴도르프 제독의 함대가 구형 전함으로만 구성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이다. 두 번째로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는 대공 요격에 전념하여, 공격의 근원지인 항공모함을 발본색원하지 않은 것으로 많은 비판을 받은 상황을 든다. 스프루언스는 비판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이 통쾌하겠지만, 위험을 감수할 순 없었다.'라고 해명한다. 스프루언스는 [[어니스트 킹]] 제독과 [[체스터 니미츠]] 제독으로부터도 사적인 자리에서 판단이 옳았다는 격려를 받았다. 자신을 저지한 스프루언스 제독에게 울화통을 터트린 [[마크 미처]] 제독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석에서 참모장 [[알레이 버크]] 대령과 식사를 하며 '뒤돌이켜보니 스프루언스 제독이 옳은 판단을 한 것 같다.'고 자신의 돌출 행동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개석상에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홀시는 이런 비난, 즉 사령부를 뒤덮다 못해 제독들에게까지 압박을 주는 그 시선들을 의식할 수 밖에 없었다. 사령부에서, 제독들은 참모들과 다른 제독들의 의견을 경청해야했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자기 확신이 있다 한들 그렇게까지 다수의 비판에 몰리면, 스프루언스 제독같이 돌부처 같은 사람조차도 자신이 독선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궁색한 변명이나마 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두 번째 지적에 따르면, 홀시의 북상은 홀시의 실수가 아니라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집단적 의사 결정이 잘못된 것이며, 문제의 원인은 니미츠가 스프루언스의 옳은 결정을 옹호해주지 않는 대신, 사령부 전체의 불화를 가라앉히는 선택을 한 것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홀시 역시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 항공모함을 공격하지 않은 것이 실수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로는 왜 이 [[태평양 전쟁|전쟁]]을 시작했느냐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본이 먼저 공격해왔기 때문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진주만 공습]]이었다. [[미국]]은 [[대한민국]]보다 한참 먼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기도 전에 [[미국 독립 전쟁]]과 [[남북전쟁]]을 겪었다.[* 한국사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 독립 전쟁]]은 영조 말~정조기이며, [[남북전쟁]]은 철종~고종 초에 일어났다.] 시끄러워질 일들은 다 끝나고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것이 안정되고 넓은 영토와 풍부한 자원으로 나날이 발전할 행복할 일만 남았는데, 뜬금없이 자기들 집에 불을 지르고 줄 생각도 없는 자원을 두고 김칫국을 마시면서 찬물을 끼얹는 분위기 파악 못하는 인간들을 보면 화나지 않는 게 이상하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의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 정부에 연설할 때 진주만을 언급하자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이 함께 단합되어 동맹국도 아닌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과 러시아 제재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을 정도면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넘은 지금까지도 [[진주만 공습]]이 미국에게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지는 명확하다. 해외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아직도 진주만 이야기만 나오면 [[일본]]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미국인]]들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미 태평양 함대의 베테랑들은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진주만 공습에서 지인을 잃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새로 들어온 신병들도 전부 진주만 공습에 분개해서 들어왔다. 진주만 공습의 최후의 생존함인 즈이카쿠를 격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태평양 전쟁 그 자체가 미 해군 장병에게 있어서는 감정의 문제였고, 남들이 비판을 하든 말든 간에 그들도 기꺼이 인정했다. [[둘리틀 특공대]]도 그런 면이 있었고, 전함 [[웨스트버지니아]]는 순전히 감정의 문제 때문에 건져내서 대개장한 것이었다. 거기서 한발 물러선 채로 거기에 동참하지 않고 즈이카쿠를 돌려보낸 스프루언스는 함대 장병은 물론이고 미국 언론으로부터도 욕을 먹었다. 2번째가 전술적인 판단에 대한 관점이라면 3번째는 말 그대로 국민 감정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홀시 역시 거기에 동감하는 축에 속했고, 홀시와 의견을 같이 한 사람들이 태평양 함대 장병의 절대다수였다. 게다가 스프루언스는 인디애나폴리스가 자신의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포틀랜드급 중순양함]] 인디애나폴리스를 5함대 기함으로 삼는 기행을 벌였기 때문에, 한발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전쟁을 바라봤다는 옹호조차도 하기 힘들었다. 기함 선택은 함대 사령관 재량이므로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는 단순한 생각이 들 수도 있으나, 저건 명백한 기행이다. 보통 기함은 함대 사령관 보호를 위해서라도 튼튼하고 정보 수집과 중계를 통한 원만한 작전 지휘와 스트레스 받으며 잠도 못 자고 고생하는 참모들을 위해서라도 전함이나 항공모함같은 큰 공간을 가진 배로 선정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보통은 전함, 항공모함에 함대 사령관이 탑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스프루언스는 상당히 감정적인 이유로 겨우 중순양함을 기함으로 선택했고, 그 좁아터진 배에서 고생해야 하는 참모들의 처지를 감안하면 이는 명백한 기행이다. 결국 카미카제로 큰 손상을 입은 인디애나폴리스를 떠나 구형전함 뉴멕시코로 기함을 옮겼는데, 여기서도 카미카제 2연타를 맞고 화재가 발생했다. 참모들은 스프루언스 제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함 내를 동분서주했는데, 찾고 보니 수병들과 함께 소방호스를 들고 있었다고 한다. 솔선수범하는 거야 좋지만 함대 사령관은 함대 전체의 생사를 책임지는 위치이므로 위험상황에는 대피를 우선으로 해야 한다. 기함 선정은 함대 사령관의 특권이지만, 먼저 참모들을 배려해야 했기에 결국 홀시와 같은 아이오와급 전함 뉴저지로 기함을 옮긴다. 뉴저지에서는 사령관과 참모들을 위해 큰 선실을 2개나 마련해놓아 참모들이 기뻐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사마르 해전 이후, 구출된 태피 3의 장병들은 홀시가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개했으나, '''"당시 즈이카쿠를 잡으러 갔고, 격침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설명을 듣고는 홀시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전쟁을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부대의 사기가 중요하고, 사기와 감정은 떼어놓을 수 없으므로, 즈이카쿠를 격침하는 선택은 태평양 함대 수뇌부가 언젠가는 해야 할 선택이었다.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의 주력함은 거진 틀어박혀 있었으므로, 즈이카쿠의 격침은 이 해전이 마지막 기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1944년 이후, 태평양 함대는 [[카미카제]]로 피해를 입으면서, 함대 장병들의 사기를 유지하지 못해 많은 곤란을 겪은 것도 사실이고, 그 결과 [[프린스 오브 웨일스(동음이의어)|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리펄스]]의 보복을 하기 원했던 [[영국 태평양 함대]]의 참전을 허락해야 했다. 네 번째는 홀시가 의도하지 않은 것이지만, [[카미카제]] 문제다. 일본의 항공모함을 모조리 일소하면서, 일본의 자살 항공기가 날아올 방향은 뻔하게 되었고, 함대 방공망의 배치도 단순한 원형진이 아니라 육지 쪽을 더 촘촘하게 구성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미카제는 평범하게 돌입하는 뇌격기, 급강하 폭격기보다 더 막기 어려웠다. 그런데 만일, 적에게 경항공모함이 남아있었다면? 네 번째 지적은 상상의 영역이긴 하나, 첫 번째 지적과 맥이 닿아 있다. 일본의 항공모함 세력은 몰락하였으나, 완벽하게 파멸한 그 해전에서 써먹을 구석이 등장한 아이러니가 발생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